문헌학

본문비평의 기초: 더 좋은 읽기 판단 원리

editor220308 2026. 1. 9. 09:18

서로 다른 읽기 중 무엇을 본문으로 둘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문비평의 핵심은 ‘멋진 해석’이 아니라 확인 가능한 근거로 선택을 남기는 판단 순서입니다.

 

본문비평의 기초: 더 좋은 읽기 판단 원리

 

 “더 좋은 읽기”는 감이 아니라, 순서가 있습니다

 

같은 작품인데도 자료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를 때가 있습니다.

처음엔 “더 자연스러운 문장”을 고르면 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만 하면 선택이 취향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본문비평이 말하는 “더 좋은 읽기”는 멋있게 해석한 문장이 아니라, 왜 그 읽기를 택했는지 다시 확인 가능한 근거가 붙어 있는

읽기입니다.

 

텍스트를 가능한 한 신뢰할 만한 형태로 복원하려는 학문적 절차가 바로 본문비평의 목표라는 점에서, 출발점은 언제나

“확인 가능한 선택”입니다. 

 

용어 풀이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 전승 과정에서 생긴 차이(변이)를 비교해, 본문으로 둘 읽기를 판단하고 그 근거를 남기는

작업입니다. 

 

판단은 ‘기호 해독’이 아니라, 네 단계로 굴러갑니다


본문비평의 실제 흐름은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단순합니다.

넓게 보면 자료를 모으고(recension),

변이를 검토하며(examination),

필요하면 보완 판단을 한다(emendation)는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실전에서는 이를 네 단계 질문으로 바꾸면 훨씬 읽기 쉽습니다.

 

첫째, “지금 다른 게 정확히 어디인가?”(위치 고정)
둘째, “각 자료가 뭐라고 쓰고 있나?”(변이 목록)
셋째, “자료 쪽 근거는 어떤가?”(외적 근거)
넷째, “문장 자체 근거는 어떤가?”(내적 근거)

 

여기서 중요한 건 3번과 4번을 ‘둘 중 하나’로 고르는 게 아니라, 둘을 동시에 보고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더 잘 설명하는가”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외적 근거: “어느 자료가 말하나”를 먼저 정리합니다


외적 근거는 간단히 말해 “누가 그렇게 전했는가”입니다.

오래된 자료냐, 독립적인 계통에서 동시에 확인되느냐, 특정 편집본에서만 나타나느냐 같은 정보가 여기에 들어갑니다.

이 단계에서 자주 하는 실수는 모든 자료를 같은 무게로 놓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료의 성격(사본인지, 후대 인쇄본인지, 편집이 개입된 전사본인지)에 따라 같은 차이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다만 외적 근거가 곧바로 정답을 주는 건 아닙니다.

오래된 자료가 늘 옳지도 않고, 널리 퍼진 읽기가 언제나 원형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외적 근거는 “후보를 좁히는 체”에 가깝고, 마지막 결론은 다음 단계(내적 근거)에서 더 단단해집니다.

 

내적 근거: “왜 그런 형태가 생겼는가”를 따져 봅니다


내적 근거는 문장 자체에서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문맥의 흐름, 저자의 말버릇(문체), 논리적 연결,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매끈하게 만들기’ 같은 경향을 함께 봅니다.

 

여기서 자주 쓰이는 원칙이 “더 어려운 읽기”입니다.

필사자는 보통 낯선 표현을 더 익숙한 표현으로 고치려는 경향이 있어, 지나치게 매끈한 문장이 오히려 후대 정리의 결과일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물론 “어려우면 무조건 원형”은 아닙니다.

스스로 말이 안 되는 문장까지 억지로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어려움”과 “이상함”을 구분하라는 경고가 늘 따라붙습니다. 

 

용어 풀이
더 어려운 읽기(lectio difficilior): 필사자는 낯선 표현을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전제로, 지나치게 매끈한

읽기보다 약간 거친 읽기가 원형일 가능성을 검토하는 기준입니다.

 

용어가 한꺼번에 나올 때는 ‘역할’로 쪼개면 됩니다


이 지점부터 레마, 이문, 시글럼 같은 단어가 한꺼번에 나오기 쉽습니다.

용어를 정의로만 붙이면 읽는 사람이 금방 지칩니다.

 

역할로만 잡아도 충분합니다.


레마는 “본문으로 둔 기준 읽기”,

이문은 “그 자리의 다른 읽기”,

시글럼은 “자료 이름을 줄여 부르는 약칭”입니다.

 

이 셋을 외우는 게 아니라, “본문(레마)을 정하고 다른 읽기(이문)를 출처(시글럼)와 함께 남긴다”로 한 문장에 넣어 이해하면

막히지 않습니다.

 

용어 풀이
레마(lemma): 본문에 채택한 기준 읽기입니다.

 

용어풀이
이문: 같은 자리에서 다르게 전해진 읽기입니다.

 

용어풀이
시글럼(siglum): 자료를 짧게 표시하는 약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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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해보면 감이 잡히는 ‘짧은 사례’


가령 어떤 구절이 자료 A와 B에서는 “곧장”으로, 자료 C에서는 “가만히”로 전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의미가 달라지는 만큼 선택이 필요합니다).


먼저 외적 근거를 봅니다.

 

A와 B가 서로 독립적인 전승 갈래에서 확인되고, C가 후대 편집본 한 갈래에만 나타난다면 A와 B 쪽이 일단 유리합니다.


다음으로 내적 근거를 봅니다.

 

문맥이 ‘서둘러 행동했다’는 흐름이라면 “곧장”이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가만히”는 필사자가 앞줄의 비슷한 표현을 끌어와 바꿔 적었을 가능성(눈이 비슷한 단어로 미끄러짐)을 떠올리게 한다면, “곧장”이 다른 읽기 들을 더 잘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연스럽다”로 끝내지 않는 것입니다.

1) 독립 자료에서의 분포(외적 근거)와

2) 문맥과 필사 경향으로의 설명력(내적 근거) 두 줄이 함께 붙으면 선택은 훨씬 단단해집니다.

 

결론을 ‘검증 가능하게’ 만드는 마지막 한 단계


본문비평은 결론을 내리는 순간보다, 결론을 남기는 방식에서 품질이 갈립니다.

저는 마지막에 늘 한 줄을 남겨 두는 편이 마음이 편했습니다.


“무엇을 본문으로 두었는가(레마), 어떤 다른 읽기가 있었는가(이문), 그 근거는 무엇이었는가(외적 1줄 + 내적 1줄).”

이렇게 적어 두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와 판단을 재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습관은 본문을 인용할 때도 바로 효과가 납니다.

인용문이 ‘좋은 문장’이 아니라 ‘확인된 문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인한 것과 보류한 것을 남기는 편이 오히려 깔끔합니다


본문비평에서 가장 좋은 태도는 모든 걸 단정하는 게 아니라, 단정할 수 있는 부분과 보류할 부분을 구분해 두는 것입니다.

 

저는 보통 1) 자료 분포는 확인했다, 2) 문맥상 설명력은 점검했다, 3) 다만 계통 관계(스테마)까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같은 식으로 메모를 남겨 둡니다.

이 한 줄이 있으면, 나중에 더 좋은 자료를 만났을 때도 판단을 무너뜨리지 않고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읽기”는 결국 더 단호한 사람이 되는 기술이 아니라, 더 정확히 확인하고 더 정직하게 기록하는 습관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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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하는 질문(FAQ)


Q. “더 어려운 읽기”면 무조건 본문으로 두면 되나요?
A. 아닙니다. “어려움”이 “말이 안 됨”으로 넘어가면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 읽기가 저자의 문체로 가능하고, 다른 읽기를 설명하는 힘이 있는지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Q. 외적 근거(자료 분포)와 내적 근거(문장 근거)가 충돌하면요?
A. 충돌 자체가 흔합니다. 이럴 때는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더 잘 설명하는가”로 정리해 보세요. 경우에 따라 본문을 보류하고,

변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선택도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Q. 레마·이문·시글럼이 한꺼번에 나오면 너무 어렵습니다.
A. 용어를 외우기보다 역할로 잡으면 됩니다. “본문(레마) + 다른 읽기(이문) + 출처(시글럼)” 이 한 줄만 유지해도 교감기는

읽히기 시작합니다.

 

Q. 한 번 정한 본문은 바꾸면 안 되나요?
A. 새 자료가 나오거나, 기존 판단의 근거가 약하다는 게 분명해지면 바뀔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바뀐 이유와 범위를 남겨, 다시 확인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Q. 예시를 더 많이 넣어야 설득력이 생기나요?
A. 예시의 개수보다 “근거의 종류가 두 줄로 남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예시 1개라도 외적 1줄과 내적 1줄이 붙으면 충분히 단단해집니다.

 

 

관련 참고자료


Encyclopaedia Britannica: Textual Criticism – Critical methods (Encyclopedia Britannica)
MLA Committee on Scholarly Editions: Guidelines for Editors of Scholarly Editions (Modern Language Association)
Lectio difficilior potior(더 어려운 읽기 원칙) 개요 (위키피디아)
Encyclopaedia Britannica: Textual criticism(개념 개요) (Encyclopedia Britannica)
Helsinki Stemmatology: Lectio difficilior 설명 (wiki.helsinki.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