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

정본 만들기의 윤리: 편집자는 어디까지 개입해도 되는가

editor220308 2026. 1. 8. 18:38

정본은 ‘읽기 좋은 문장’이 아니라 ‘무엇을 왜 골랐는지 끝까지 남기는 본문’입니다.

개입 범위, 추정 보완 표시, 다시 확인 가능한 기록 기준을 실전으로 정리합니다.

 

 

정본 만들기의 윤리: 편집자는 어디까지 개입해도 되는가

 

정본은 ‘완벽한 원문’이 아니라 ‘근거를 남긴 본문’입니다


정본을 만든다는 말은 글을 더 매끈하게 고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승 자료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남아 있을 때, 무엇을 본문으로 제시했는지와 그 이유를 독자가 따라갈 수 있게 남기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정본의 설득력은 문장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보다, 선택과 변경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가

보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정본은 결국 “믿어 달라”가 아니라 “확인할 수 있다”로 말해야 오래 버팁니다.

 

용어 풀이
정본(定本): 여러 이본, 사본, 판본을 비교해 편집자가 본문으로 제시한 텍스트입니다.

확정은 정답 선언이 아니라, 근거와 절차를 갖춘 결론입니다.

 

개입을 막는 윤리보다, 개입을 ‘보이게’ 하는 윤리가 중요합니다


편집자는 일정 범위에서 개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개입 자체가 아니라, 개입이 본문 속에 조용히 섞여 들어가 독자가 원문과 편집자의 손길을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윤리는 금지 규정처럼 세우기보다, 원칙을 단순하게 잡는 편이 실용적입니다.

바꾸면 남기고, 추정이면 표시하고, 기준은 글 전체에서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이 세 가지가 지켜지면, 편집자의 판단은 취향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선택으로 읽힙니다.

 

먼저 정해야 하는 것: ‘어디까지 손댈 것인가’의 경계선


정본 작업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기준이 중간에서 바뀌기 때문입니다.

시작 전에 경계선을 한 문단으로 고정해 두면 판단이 안정됩니다.

 

예를 들어 내 작업이 어디에 가까운 지부터 정해 두면 좋습니다.
보이는 대로 옮기는 전사 중심인지, 표기나 약자처럼 형식만 정리하는 제한 정리인지, 본문을 선택하고 다른 읽기는 기록으로

남기는 비판 편집인지, 표점, 띄어쓰기까지 손봐 읽기 성을 높이는 읽기 본인지가 기준이 됩니다.


이 기준이 선명하면, 읽는 사람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편집자는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용어 풀이
전사: 원문을 ‘보이는 그대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의미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최대한 보존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교감 기와 이문을 ‘정의’가 아니라 ‘역할’로 이해하면 글이 쉬워집니다


정본 관련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문 용어 자체보다, 용어가 설명 없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딱 한 번만 역할로 풀어주면 독자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교감 기는 “본문에 올리지 않은 다른 읽기와 그 근거를 모아 둔 기록”이고, 이문은 “같은 자리에서 다르게 전해진 표현”입니다.

정본에서 본문은 ‘선택의 결과’이므로, 그 선택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 함께 있어야 설명이 단단해집니다.

 

용어 풀이
교감기(apparatus): 본문에 올리지 않은 다른 읽기(이문)와, 왜 그 읽기를 제외했는지의 근거를 기록해 두는 장치입니다.

 

용어풀이
이문(異文): 같은 위치에서 서로 다르게 전해진 표현입니다. “다른 주장”이라기보다 “다른 증거”로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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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고르는 기준이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더 좋은 읽기’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순서를 먼저 잡아두는 편이 도움이 됩니다.”

 

에만데이션(추정 보완)은 ‘마지막 수단’이고, 표시는 필수입니다


증거가 훼손되거나 결락이 커서 어떤 읽기도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편집자는 추정으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추정은 가장 강한 개입이기 때문에 표시가 없으면 독자가 원문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원칙은 단순합니다.

 

왜 불가피했는지 한 줄, 어디를 어떻게 보완했는지 한 줄.

 

이 두 줄이 있으면 독자는 편집자의 개입을 “숨은 수정”이 아니라 “공개된 판단”으로 읽게 됩니다.

 

용어 풀이
에먼데이션(emendation): 증거들만으로 문장이 성립하지 않을 때, 편집자가 추정으로 바로잡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표시와 이유가 함께 가야 합니다.

 

작은 차이가 해석을 바꾸는 순간


어떤 사본에서 한 글자가 비슷하게 보여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한쪽은 ‘가능/불가능’처럼 뜻이 분명 해지지만, 다른 쪽은 문장이 어색해집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다른 자료에서 같은 읽기가 확인되는지 한 번 더 보고, 본문에 올렸다면 그 이유를 짧게 남기는 편이 안전합니다.

 

여기서 “문맥상 불가가 자연스럽다”만으로 본문을 고치면 근거가 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최소한 두 가지만 남기면 충분합니다.

첫째, 다른 증거(다른 사본, 판본, 동시대 인용 등) 중 하나에서라도 “불가”가 확인되는지.

둘째, 본문에 “불가”를 올렸다면 변경 사실과 근거를 주석이나 교감기에 남겼는지.

모든 자료를 다 뒤질 필요는 없습니다.

 

결정에 영향을 주는 증거 1개를 더 확인하고, 확인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부터가 실제로 가장 효과적입니다.

 

‘짧게 남겨도 튼튼해지는’ 최소 기록 5줄


정본은 설명을 길게 늘일수록 강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짧고 반복 가능한 기록이 강합니다.

 

아래 다섯 줄이면 독자가 다시 확인할 길이 열립니다.


저본(기준 자료) / 범위(권, 쪽, 행) / 원칙(개입 수준) / 본문 선택 기준(2~3개) / 예외(추정 보완, 보류가 있으면 표시와 이유).


이 다섯 줄이 갖춰지면, 정본은 ‘보기 좋은 문장’이 아니라 ‘다시 확인 가능한 선택’으로 남습니다.

 

용어 풀이
저본: 본문 편집의 기준점으로 삼는 자료입니다.

저본을 둔다고 해서 다른 자료를 버린다는 뜻은 아니고, 비교의 중심을 세우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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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기의 기호와 약어가 익숙해지면,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가 문장으로 훨씬 간결하게 정리됩니다.

 

마무리하며

정본의 윤리는 “얼마나 손댔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왜, 어디까지 손댔는가”를 숨기지 않는 데서 성립합니다.

문장이 매끈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득이 생기지 않습니다.

 

바꿨다면 남기고, 추정이라면 표시하고, 기준은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지켜질 때 정본은 단정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선택으로 남습니다.

 

자주 하는 질문(FAQ)


Q. 정본은 원문을 그대로 두는 게 원칙인가요?
A. “그대로”의 기준부터 정해야 합니다. 전사 중심인지, 비판 편집인지에 따라 허용되는 정리가 달라집니다.

 

Q. 띄어쓰기, 표점은 정리해도 되나요?
A. 가능합니다. 다만 범위를 밝혀야 합니다.

의미가 바뀔 수 있는 지점은 흔적을 남기는 편이 안전합니다.

 

Q. 에만데이션을 하면 정본의 가치가 떨어지나요?
A.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불가피성 설명과 표시가 없을 때 문제가 됩니다.

 

Q. 교감기를 꼭 붙여야 하나요?
A. 규모에 따라 형태는 달라도, 본문에서 제외한 읽기와 변경 근거를 남길 장치는 필요합니다.

 

Q. 저본을 하나 정하면 나머지는 무시해도 되나요?
A. 아닙니다. 저본은 비교의 중심일 뿐이고, 중요한 대목에서는 다른 증거로 흔들림을 점검하는 방식이 함께 가야 합니다.

 

 

관련 참고자료

 

MLA Committee on Scholarly Editions, Guidelines for Editors of Scholarly Editions

TEI P5 Guidelines, Critical Apparatus (TC)

Guide to Documentary Editing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The Chicago Manual of Style, Notes and Bibli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