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정본은 본문만 제시하는 책이 아닙니다.
서문, 본문, 교감기, 주석이 어떤 역할로 분업해, 독자가 다시 확인 가능한 근거를 남기는지 구성 원리를 정리합니다.

비판정본은 ‘본문’이 아니라 ‘구성’으로 설득합니다
비판정본을 처음 접하면 본문이 핵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본문을 둘러싼 구성 전체가 설득의 무게를 나눠 갖습니다.
한 작품이 여러 사본과 판본으로 전해질 때, 편집자는 하나의 읽기를 본문으로 세우고 나머지 읽기와 판단 근거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이때 본문만 앞세우면 “왜 이 문장을 골랐는가”가 빠져 설득이 얇아지기 쉽습니다.
반대로 구성 요소가 제자리에 있으면, 편집자의 권위에 기대지 않아도 텍스트가 스스로 버팁니다.
비판정본은 바로 그 구조를 갖춘 편집본입니다.
용어 풀이
비판정본(critical edition): 전승 자료(사본·판본 등)를 비교해 본문을 제시하고, 다른 읽기와 판단 근거를
교감기, 주석, 서문 등으로 공개한 편집본입니다.
비판정본의 기본 구조: 네 요소가 맞물리는 방식
비판정본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 사람이 할 일을 네 칸이 분업한다”로 보는 것입니다.
서문은 무엇을 자료로 삼았고(범위), 어떤 기준으로 편집했는지(원칙)를 먼저 밝힙니다.
본문은 선택의 결과를 읽기 흐름으로 제시합니다.
교감 기는 본문에 올리지 않은 읽기와 출처를 보여줘 독자가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주석은 이해를 돕거나 판단의 이유를 보태, 독자가 ‘왜’라고 물을 때 길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이 네 칸이 균형을 이루면 본문은 읽히고, 근거는 남고, 설명은 과하지 않게 정돈됩니다.
서문: ‘약속’과 ‘범위’를 먼저 공개하는 곳
서문은 길어야 좋은 게 아니라, 빠져야 할 게 없으면 충분합니다.
독자가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료 범위입니다.
어떤 사본과 판본을 봤는지, 무엇을 제외했는지, 결락이나 훼손이 있는 자료는 어떻게 처리했는지처럼 “이번 편집이 다루는
세계의 경계”가 필요합니다.
둘째, 편집 원칙입니다.
전사 중심인지, 표기만 정리하는지, 본문을 선택하는지, 표점과 띄어쓰기까지 적극 손보는지 같은 기준이 서문에 한 문단으로만
있어도 독자의 혼란이 크게 줄어듭니다.
서문은 결국 “이 책은 무엇을 약속하는가”를 밝히는 자리입니다.
약속이 분명하면, 본문에서 낯선 표기나 어색한 구절을 만나도 독자는 그것을 오류로 단정하지 않고 “원칙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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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흐름을 지키면서 선택을 드러내는 법
본문은 독자가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이므로 읽기 흐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가능한 한 가볍게 두는 편이 좋습니다.
가볍게 둔다는 말은 정보를 빼라는 뜻이 아니라, 정보의 종류를 분리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이 모든 근거를 끌어안으면 문장 흐름이 끊기고, 독자는 핵심을 놓칩니다.
비판정본에서는 본문을 결론으로 두고, 근거는 교감 기와 주석으로 분산시키는 방식이 안정적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본문은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문 안에서 매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문에서 원칙을 밝히고, 교감기에서 다른 읽기를 공개하면 본문은
스스로 말할 수 있습니다.
교감기: 본문 뒤편을 공개해 ‘다시 확인’이 가능해지는 자리
교감 기는 본문에서 채택하지 않은 읽기(다른 전승 형태)를 기록하는 장치입니다.
교감기의 목표는 ‘많이 적기’가 아니라 ‘다시 찾기’입니다.
즉, 어떤 자리에서 무엇이 갈렸는지, 그 읽기가 어느 자료에서 왔는지, 편집자가 무엇을 본문으로 올렸는지가 최소로 보이면
역할을 합니다.
교감 기를 어렵게 만드는 건 대개 내용이 아니라 표기입니다.
자료 이름을 매번 길게 쓰지 않고 약칭으로 줄이기 때문에, 교감 기를 보기 전에는 약칭 표(약어표)가 필요합니다.
약칭 표가 있으면 교감기는 갑자기 쉬워집니다. “
이 읽기가 어디에서 왔는지”가 바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용어 풀이
교감기(apparatus): 본문에 올리지 않은 다른 읽기와 그 출처를 기록해, 독자가 선택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용어풀이
약칭(시글럼, siglum): 각 사본·판본을 한 글자나 짧은 기호로 줄여 표시한 이름입니다.
교감기에서 자료 출처를 빠르게 가리키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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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이해를 돕는 설명’과 ‘판단을 보태는 설명’을 구분합니다
주석은 한 칸처럼 보이지만 성격이 다른 두 종류가 섞이기 쉽습니다.
하나는 독자 이해를 돕는 설명입니다.
인물, 제도, 지명, 어휘처럼 내용을 따라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다른 하나는 편집 판단을 보태는 설명입니다.
왜 이 읽기를 본문으로 올렸는지, 다른 읽기가 왜 배제됐는지, 근거가 무엇인지처럼 “선택의 이유”를 짧게 덧붙입니다.
두 종류의 주석을 섞어도 되지만, 문장 톤을 다르게 하면 읽는 사람이 훨씬 편합니다.
이해 보조형은 담백하게 사실을 알려주고, 판단 보조형은 “근거ㅡ 결론” 구조로 짧게 정리하는 방식이 안정적입니다.
부록, 서지, 색인: ‘다시 찾는 길’을 마련하는 출구 표지판
비판정본의 사용감은 부록에서 크게 갈립니다.
약칭 표, 사용 자료 목록, 참고문헌, 소장처 정보, 색인은 독자가 본문에서 생긴 의문을 빠르게 회수하게 해 줍니다.
특히 참고문헌과 소장처 표기는 단순한 격식이 아니라 “같은 자료로 되돌아갈 수 있는 좌표”입니다.
본문이 아무리 좋아도 좌표가 흐리면 독자는 확인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서문과 서지가 다시 연결됩니다.
서문에서 밝힌 범위와 원칙이 부록의 기록 방식과 충돌하지 않아야 전체가 일관되게 보입니다.
용어 풀이
서지: 자료를 식별하고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저자, 서명, 판사항, 간행 정보, 소장처 같은 요소를 갖춰 적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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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을 ‘구성’으로 정리하는 방법
어떤 구절에서 A자료는 “가다”로, B자료는 “오다”로 전한다고 해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둘 중 하나를 채택해 문장 흐름을 유지합니다.
교감기에는 “이 자리에서 다른 읽기가 있다”는 사실과 출처(어느 자료가 어느 읽기인지)를 남깁니다.
주석에는 선택 이유를 한 문장만 덧붙입니다. 예컨대 “이 대목의 앞뒤 문장이 이동을 전제로 하므로 본문은 ‘가다’로 둔다”처럼
짧게 끝냅니다.
서문에서는 이런 판단이 어떤 기준(예: 문맥의 자연스러움, 자료의 신뢰도, 일관성)을 따라 이루어졌는지 큰 원칙만 밝힙니다.
이렇게 역할을 나누면 본문은 읽히고, 근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판정본이 설득력을 얻는 방식은 결국 “정보를 줄여서”가 아니라 “정보를 알맞은 칸에 두어서”입니다.
비판정본은 ‘설득의 재료를 배치하는 기술’입니다
비판정본의 핵심은 본문만으로 결론을 밀어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문에서 범위와 원칙을 약속하고,
본문에서 선택의 결과를 제시하며,
교감기에서 다른 읽기와 출처를 공개하고,
주석에서 이해와 판단을 연결하는 것.
이 네 칸이 제자리에 있으면 독자는 편집자의 말을 믿기 전에, 스스로 확인할 길을 먼저 얻게 됩니다.
그 확인 가능성이 쌓일수록 본문은 더 단단해집니다.
자주 하는 질문(FAQ)
Q. 서문이 짧으면 비판정본으로서 약해지나요?
A. 길이보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자료 범위, 저본(기준 자료), 편집 원칙, 표기 관례가 보이면 짧아도 충분히 단단합니다.
Q. 교감기는 ‘전부’ 기록해야 하나요?
A. 목표에 따라 달라집니다.
다만 본문 선택에 영향을 준 변이, 의미를 바꾸는 차이는 최소로라도 남기는 편이 안전합니다.
Q. 주석은 설명만 써야 하나요?
A. 설명 주석과 판단 주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다만 목적이 다른 문장이 섞이지 않도록 톤을 나누면 읽기 성이 좋아집니다.
Q. 본문을 읽기 쉽게 정리하면 원문에서 멀어지지 않나요?
A. 정리의 유무보다 범위가 드러나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어디까지 정리했는지 원칙이 보이면 독자는 혼동하지 않습니다.
Q. 비판정본을 읽을 때 어디부터 보면 좋나요?
A. 서문에서 범위와 약칭 표를 확인한 뒤 본문을 읽고, 의심 지점이 나오면 교감기와 주석으로 이동하는 방식이 부담이 적습니다.
관련 참고자료
MLA Committee on Scholarly Editions, Guidelines for Editors of Scholarly Editions
TEI P5 Guidelines: Critical Apparatus (TC)
A Guide to Documentary Editing (UVA Press): Introduction
The Chicago Manual of Style: Notes and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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